매즈 미켈슨 주연의 2013년도 영화. 영화는 주인공인 루카스가 친구들과 강물에서 물장난을 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다들 나이가 꽤 많아보이는데도 천진난만하게 놀이에 빠져있다. 물놀이를 마치고 나오면서 술 한잔을 약속하는 무리의 모습에서 두텁고 따뜻한 우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혼의 상처를 안고 고향으로 내려온 루카스지만 그에게는 이렇게 그를 친가족처럼 챙겨주는 친구들이 있다. 소박하지만 그를 필요로하는 귀여운 아이들이 가득한 유치원의 선생님이라는 직업도 있다. 최근엔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사이가 꽤 좋다. 한편으로는 이혼 후 헤어져 살았던 아들 마르쿠스와 함께 살게될 희망도 가지고 있다.
힘겨웠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묵묵히 안정적이고 행복한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기다리는 남자, 그가 루카스다. 이런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가 근무하는 유치원의 아동을 성추행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소문의 근원이 되는 아이는 루카스와 가장 친한 친구 테오의 딸 클라라다. 근거 없는 소문은 작은 마을에 삽시간에 퍼지고 곧 모두에게 진실로 여겨진다. 곧, 루카스는 공공의 적이 된다.
영화가 문제 제기를 하며 각성을 촉구하는게 이 지점이지만 이러한 집단적 맹목(盲目)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개인과 집단의 안전을 위해서 부정적인 뉴스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증인이 “좀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성실하고 사려깊은 유치원 원장님이라면? 성범죄자가 혼자 사는 이혼남이라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난다던데…? 이런 상황에서는 소문이 거짓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소문이 진실이라고 단정하고 그렇지 않을 확률을 검토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게 우리의 본능이다.
영화는 더러운 범죄(아동 성범죄)의 누명을 쓴 주인공 루카스가 모든 것을 잃어가는 모습을 처절하게 하지만 현실감있게 묘사한다. 그는 헌트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사냥감 처지나 다름없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이어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데도 그는 끊임없이 사지로 내몰린다. 직업을 잃고 여자친구를 잃는다.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사람들의 시선이다.
동네 주민들은 그를 이상 성욕에 도착된 변태로 바라본다. 단순히 물건을 사러간 슈퍼마켓에서 쫓겨나고 물놀이를 함께 하고 노래를 같이 부르던 죽마고우들로부터도 버림을 받는다. 졸지에 피해자의 부모가 되어버린 절친 테오도 처음에는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이야기라며 울면서 부정하다 결국엔 소문에 감염되어 루카스에게 반쯤 확신에 차 이런 말을 내뱉는다. “니가 내 딸을 건드린게 사실이면 네 머리에 총알을 박아버리겠어!” 뿐만 아니라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의 양육권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높이에서 추악한 불명예를 뒤집어 쓰고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해버린 인생. 그는 날개를 잃고 떨어진 몸을 끌어 올리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어쩌랴. 바이러스라면 약이라도 있을텐데 보이지 않는 유령같은 소문의 공격은 물리칠 방법도 마땅치 않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의 막막함이 관객들을 사로잡고 극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그는 어떻게 될까. 주홍글씨를 새긴채 남은 여생을 살아가게 될까 아니면 명예를 회복하고 당당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까.
처음 현실을 왜곡시키기 시작한 것은 붕괴된 믿음이었다. 그 왜곡된 현실을 복구하기 위한 길은 경찰의 무죄 확인도 아니고 현실 도피도 아니며 오직 믿음의 회복이라는 아주 아주 아주 어려운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리고 그 믿음의 회복이라는 것이 겉보기에는 감동적인 과정이지만 그 효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할 수 없음을 마지막 반전을 통해 확인시켜준다. 깨진 유리를 다시 붙여도 금이 생겼던 흔적까지 없앨 수는 없는 것 처럼 말이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배우들의 명연기를 통해 마녀사냥, 믿음과 신뢰, 장난스런 운명의 잔인함 같은 것들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주는 매력적인 영화다.